[특별인터뷰③] “양돈 미래요? 성장 가능성 무궁무진합니다”
[특별인터뷰③] “양돈 미래요? 성장 가능성 무궁무진합니다”
양돈 2세 ‘소비자 생각하는 양돈’으로
ICT 도입 통해 생산성 경쟁력 제고를
열심히 일하면 힘들어도 힘든 줄 몰라

인-허가 등 각종 규제 완화 시급
양돈 선순환 안 되고 만사 지지부진
유능한 청년들 양돈에 투신할지 의문

미래 양돈서 방역 가장 걱정된 분야
외국인 노동자 교육 후 현장 투입을
‘파이프 스톤’ 진지하게 논의 바람직
기업 양돈, 이젠 열린 마음 가져야

대체육 등 ‘가짜고기’ 위기이자 기회
한돈 고급화 차별화로 시장 지켜야

‘삼원 교잡’ 다비가 틀 잡아 큰 보람
해썹도 최초 인증, 위생-안전에 매진
공익 위해 숲 보고 개인 손실 감수도

‘돼지 키운다’고 무시 안 당하려고
책 많이 읽고 유명 인사 초청 강의
양돈 안 했다면 부모님처럼 ‘교직’
  • by 김오환 발행인

윤희진 회장의 ‘양돈 인생 50년’을 주~욱 들어본 다음, 한마디로 그것도 깔끔하게 정리해봤다. 윤 회장에 있어 양돈은 운명(運命)이었다. 처음부터 인생 목표를 세운 사람도 많지만, 적지 않은 사람의 인생은 우연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 우연이 운명이 되면서 삶을 하나하나 개척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그 길을 윤 회장은 조용하면서 때론 치열하게 걸어왔다. 한편으론 복(福)도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복(福) 이야기를 꺼내자 가볍게 미소를 띠며 윤 회장은 인생 운이 좋았다 한다. “이병철 삼성 회장을 7년 반 동안 가깝게 모시고 일을 한 건 저에게 큰 행운이었죠. 늘 긴장했지만 그분의 경영 스타일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배울 수 있었지요. 인재제일(人才第一), 사업보국(事業報國), 합리적 사고이지요. 선진의 이인혁 회장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지요. 그분은 30대인 저에게 자금을 제외하고는 모든 걸 일임했어요. 선진서 마음껏 양돈할 수 있도록 했어요. 다비 창업 후 많은 도움이 됐지요.”

여기서 윤 회장의 따뜻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윤 회장은 그런 운(運)과 복을 혼자만 갖지 않고 주위에 베풀고 나누었다. 양돈인 치고 윤 회장과 인연 없는 사람 없고, 신세 지지 않은 사람 없는 것 같아서다. 특히 주위에서 윤 회장을 가만두지 않는다. 일만 있으면 앞장세웠다. 그 역시 사양하지 않고 양돈 발전하는데 도움된다면 기꺼이 총대를 멨다. 그래서 그는 양돈 관련 단체 초대 회장 직함이 많다. 그중에서 아끼는 단체가 어느 곳이냐고 물었다. “양돈연구회도 도드람도 있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관련 있는 도드람이지요.”

도드람. 이천에 있는 산(돋울음) 이름에서 유래됐다.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1990년대 초반 최대 이슈는 UR 등 축산물 수입 개방이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살’ 방안을 고민했지요. 그래서 몇몇이 만나 사료공동구매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kg당 3원씩 적립, 사업회를 운영했지요. 이 사업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이냐를 놓고 이범호(나람사료대표), 진길부(故 전 도드람조합장), 김대성(전 도드람B&F 대표이사), 저 포함해서 넷이 매주 3~4차례 논의했지요. 그게 도드람조합 모태입니다. 알다시피 이후 사료공장건립, 신용사업 진출, 도축장 건립을 통한 한돈 유통 강화 등 한국 양돈업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지요. 그렇게 성장 발전했다는 게 감개무량하지요. 고맙고 대견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평생을 걸쳐 양돈했다는 보람을 느낍니다.”

윤 회장의 복(福) 나누기는 양돈 아닌 사회단체에도 전해진다. 그는 탈북민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2005년 금강산에 종돈을 보낸 것이 계기가 됐지만 분단 조국의 지상과제는 통일입니다. 그래서 탈북민을 돕기 시작했지요.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지요.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탈북학교 5~6곳에 일시 후원 11명을 포함해서 대학(원)생 61명을 후원했지요. 한돈도 학교에 보내요. 탈북민의 체격이 왜소해 건강 증진 위해 한돈을 보내고 있지요. ‘작은 통일’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윤 회장의 사랑은 일가(고 김용기 장로 호)재단 후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제가 16년 전에 일가재단 농업상을 수상했어요. 그런 인연으로 장학사업과 통일사업을 하고 있지요. 제가 ‘청년일가상’을 제정, 15년 동안 17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지요. 후원자 85%가 양돈인 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감사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런 공로인지 일가재단 건물에 ‘다비홀’도 있지요. 영광이지요.” 앞서 밝혔지만 윤 회장은 이외에도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 교육사업, 군포 미혼모 집, 성골롬방 수녀회 등 각종 사회단체를 후원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신을 지행합일(知行合一)하고 있다.

양돈 외적(外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양돈에 50년을 사셨으니 아끼는 후배나 농가들이 적지 않겠다 하고 연락은 어떻게 취해느냐고 물었다. “1973년 용인 양돈사업소에서 함께 했던 선후배들을, 선진 식구들, 다비 출신 직원들하고는 한번씩 연락을 취해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어쩌다 통화하면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정감이 가요. 또 다비의 협력 GP 농장 사장님들, 감사하고 고맙지요. 동업자이자 대학 후배이며 일가재단 장학위원장이신 이범호 돈마루 대표와는 종종 만나요. 의견도 구하고 그러지요. 탈북자 가운데 다비육종 직원이 있는데 참 아끼는 후배이지요. 그런데 제가 고교, 대학 후원해주고 졸업 후 다비에 근무했던 이규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 일찍 타계(他界)해 늘 아쉽게 생각하고 있지요.”

윤 회장은 영원한 양돈인이다. 다시 양돈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쉬움 안타까움이 있으면 보람찬 일도 있는 법. 물었다. “2천년 구제역이 파주에서 처음 발생했을 때 방역 요원을 지휘하며 파주 홍성 충주 구제역 확산을 막은 일입니다. 야전 침대에서 자면서 밤낮으로 통제하고 방역하면서 확산을 막았지요. 재발해서 아직도 구제역을 근절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기억에 남네요. 앞서 이야기했듯이 선진을 축산그룹으로 기초 닦아놓은 것, 도드람조합 출범 기여, 다비종돈 100만마리 공급 등을 꼽을 수 있겠네요. 특히 오늘날 삼원교잡(YLD), 다비가 틀 잡은 것도 큰 보람이지요.”

다비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비 농장 운영 방향을 여쭤봤다. “다비 운영을 위생관리에 중점을 뒀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폐사나 손실이 안정적 양돈장 경영의 최대 저해 요인이죠. 이로 인한 피해가 수익의 25% 수준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그래서 다비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결과 국내 최초로 해섭을 인증받았고, 올인-올아웃 체계를 추진했고, 3-사이트로 농장을 운영했고, MEW(특정약 투여 후 조기 이유)/SEW(격리조기이유)를 시도했지요.”

윤 회장은 젊음을 양돈에 불사르면서 인생 4분의 3을 돼지와 살았다. 자연스럽게 비조(鼻祖)가 되면서 ‘어른’이 됐다. 나이만 들어서 어른이 아니라 행동과 처신, 사회적 기여가 양돈인 모두에게 귀감이 돼야 어른이라 불린다. 그래서 양돈 2세들이나 후배들이 많이 찾고 미래 양돈이 어떻게 갈지 물어본다.

“가장 많이 받은 질문입니다. 양돈 전망있냐고? 젊은 시절 의지를 갖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하라고 하지요. 그러면 힘들어도 힘든 줄 몰라요. 새롭게 도전하고 혁신하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검소 검약하라고 당부해요. 거기서 경영의 지혜가 나오고 슬기가 나오거든요. 그런 정신 바탕에서 환경친화적이고, 이웃과 공존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양돈으로 가라 하지요.”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윤 회장은 “미래 양돈의 걱정은 인력 문제입니다. 지금도 외국인이 아니면 돼지를 키울 수 없잖아요. ICT 등 모바일 기기를 공부하고 그것을 통해 농장 모니터링하면서 AI 등 새로운 기술과 친하도록 당부하죠.” 그는 이어 소비자를 생각하는 양돈을 당부했다. “대체육이니 배양육이니 하는 ‘가짜고기’가 시장에 나왔잖아요. 소비자의 선택 폭이 그만큼 커진 것입니다. 한돈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맛있고 안전한 한돈 공급은 기본입니다. 차별화 고급화 통해 한돈 시장을 지키고 늘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윤 회장은 이어 양돈 2세들의 안정적인 사업 정착과 미래 양돈 발전을 위해 자연스럽게 정부 정책으로 이어졌다, “오늘도 몇 번 강조했듯이 양돈업 규모에 맞게 정부는 예산이나 조직 면에서 산업으로 합당하게 대우해야 합니다. 농축산부내 축산직을 부활하고, 각종 규제로 질식 상태로 몰린 양돈의 인-허가를 완화해야 합니다. 돈사의 신개축 및 증축을 허용해야 합니다. 그게 어려우니 안정적 순환이 안 됩니다. 얼마나 많은 신기술이 발표되고 있어요. 응용하고 적용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원천봉쇄되면서 더 발전할 여지가 줄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뜻있는 2세들이 양돈에 들어올지 의문입니다. 걱정입니다.”

윤 회장은 차분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양돈 발전 방향을 토로했다. “양돈 처음 들어설 때는 산업이 이렇게 성장하리라고 생각지 못했어요. 5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성장했잖아요. 사양 관리도 그렇고 인재도 많이 들어왔고. 생산성도 달라졌지요. 육류 소비도 가장 많잖아요. 앞으로도 양돈 발전 가능성은 쉽게 꺾이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의 지원과 농가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산학(産學) 연계를 강화하면서 경쟁력을 높여야죠.”

그러면서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머뭇거리던 윤 회장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래 양돈에 있어 가장 걱정되는 것은 질병입니다. PRRS 한번 걸리면 끝나잖아요. 유럽에 있는 헝가리가 양돈 PRRS로 얼마나 고생 많았어요. 방역이 사전에 미흡했으면 사후에 잘 처리해서 청정화에 주력해야 합니다. 방역을 법으로만 강화하지 말고 돈사 시설 개선을 통해 방역할 수 있도록 신-증축 조건을 완화해야 합니다. 아울러 방역에 자조금 이용도 적극 검토, 반영했으면 해요. 자조금 예산 편성할 때 기업의 목소리도 들었으면 해요. 자조금은 가장 많이 납부하는데 발언권은 없어요.”

윤 회장의 진정성은 계속됐다. “외국인 노동자 공항에서 바로 농장으로 가면 안 됩니다. 일정 기간, 일정 장소에서 교육시키고 소독해서 현장에 투입해야 합니다. 방역도 되고 생산성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정부에서 학계, 업계, 농가가 참여한 가운데 중장기 양돈 대책을 수립, 발표했으면 합니다.”

윤 회장의 진지함은 더해졌다. “앞으로 양돈은 인력 부족, 환경 강화 등으로 위축할 여지가 높아요. 대안으로 국내 정서상 어렵고 농장 간 표준화가 안 돼 어렵지만, 파이프 스톤을 검토했으면 해요. 전문가를 영입하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면 (파이프 스톤)성공할 수 있어요.” ‘파이프 스톤’ 이야기가 나오자 화두는 자연스럽게 기업 양돈으로 이어졌다. “기업 양돈의 장점은 종돈, 사양 관리, 기술개발, 인재 양성, 수익 재투자 측면에서 농가 중심의 양돈과 다르겠지요. IT 쪽에 앞장설 수 있지요. 법 중에 가장 상위법이 국민 ‘정서(情緖)법’이라 하잖아요. 이제는 달라졌으면 해요. 기업에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미래 양돈, 양돈 2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했는지 윤 회장 표정은 시원해지고 후련해지고 밝아졌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인생을 BC(기원전)와 AD(기원후)로 나눠달라 했다. 질문이 재미있다며 “삼성과 선진에서의 근무와 자영업으로 나눌 수 있겠죠. 선진에서 일할 때인 30대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다비하면서 돈 걱정, 사람 걱정, 모든 게 힘들었지요.”

윤 회장은 어릴 적 꿈이 교사였다 한다. 부모님 모두 교직에 계셔서 자신도 계승하려 했는데 대학 때 축산과로 진학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했다. 만약 삼성 입사하지 않았다면 교사로 남았을 것이라며 부모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윤 회장 사무실에는 책이 빼곡하다. 책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돼지 키운다 하면 주위에서 무시할까 봐서 역사, 경제, 사회 관련 책을 틈만 나면 읽었지요. 유명 인사 초청해서 강의도 듣고, 공부 많이 했지요. 직원들에게도 책 많이 읽으라 해요.”

양돈 50년, 한마디로 요약을 당부했다. “참 열심히 살았어요. 당장보다는 멀리 봤고, 항상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으로 사람들을 만났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공익(共益)을 위한다면 개인적인 손해도 감수했고요. 양돈하면서 항상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자고 다짐했어요. 나이 들면서 분수 지키면서 스스로 만족하려고 해요. 그러니 저절로 입에서 감사하다는 말이 자주 나와요. 감사한 일들이 너무 많아요. 아내 아픈 것 빼고는 돼지 덕분에 잘 살아왔습니다. 가업 승계까지 이루어져서 다행입니다.”

그러다 한참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입을 주시했다. 일찍 여윈 아버지에 대한 인사였다. “아버지 나 잘했지요, 그런데요. 진짜로 많이 힘들었어요.”를 들려줬다. 영화 국제시장의 대사였다고.

장장 5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일죽 IC를 거쳐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운전은 하지만 머리 속은 인터뷰 때 주고받은 이야기 이외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고 싶었다. 적절한 용어를 찾아봤다. 퍼뜩 떠올랐다. 양돈업에 대한 헌신과 사랑, 애정, 봉사에다 각종 사회단체에 대한 정기적인 후원으로 공동체 발전에 힘을 쓴 그는 ‘문화재(文化財)’였다. 평생 양돈인 이어서 ‘양돈 문화재’라 해도 나무랄 양돈인은 없을 듯했다. 윤희진 그는 ‘양돈 문화재’다. 그래서 양돈타임스는 윤 회장의 발자취를 한국 양돈의 역사 한 페이지로 남기고 싶어 그를 만났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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