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①] “꿈과 열정으로 양돈 50년 열심히 달려왔지요”
[특별 인터뷰①] “꿈과 열정으로 양돈 50년 열심히 달려왔지요”
1973년 삼성서 돼지와 인연 맺어
50여년 동안 양돈 외길 인생서
연구회, 도드람, 방본 등 이끌어
수많은 償과 감사, 공로패 수상

다비 창업 후 지도자, 후학 양성
北에 종돈 보내 ‘통일 축산’ 모색
베트남 진출 한국 양돈 위상 제고

평생 한국 양돈업 발전 기여와
사회 봉사 및 후원에도 적극적
‘양돈 문화재’라 해도 손색 없어
  • by 김오환 발행인
1960년 후반 삼성에 입사, 돈사 설립부터 종돈 수입, 사육, 출하 등 전 과정을 다룬 신입 사원이 있었다. 20대 초반 신입 사원은 ‘평생’ 한국 양돈업 경쟁력 제고에 몸을 불사른다. 바로 그 주인공이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이다.
1973년 삼성에 입사, 돈사 설립부터 종돈 수입, 사육, 출하 등 전 과정을 다룬 신입 사원이 있었다. 20대 초반 신입 사원은 ‘평생’ 한국 양돈업 경쟁력 제고에 몸을 불사른다. 바로 그 주인공이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이다.

문화재(文化財)라는 말이 있다. 역사, 민속, 생활 양식, 예술 등 문화적 가치가 있고 그 분야에서 음으로 양으로 기여가 높은 사물이나 사람을 호칭하는 것을 말한다.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물에 그렇게 붙이기도 하고 예술 분야의 불세출(不世出) 인재에 대해 부여하기도 한다. 무형문화재, 민속문화재, 인간문화재 등 다양하다.

이중 인간문화재는 한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 그 분야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한 사람에게 붙이고 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문화재는 판소리의 박동진 선생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양돈산업을 되돌아보고 ‘양돈의 문화재’를 찾아봤다.

양돈을 비롯한 한국 축산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돌아온 1968년 본격 태동됐다. 박 대통령은 축산입국(畜産立國)라는 국가적인 산업 과제를 던지고 기업들에게 축산업 참여를 독려했다. 그렇게 해서 69년에 출범한 첫 축산기업이 오늘날의 매일유업이다.

대통령 지시인 만큼 기업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국내 최고 기업인 삼성이 68년 축산에 진출키로 하고 인재를 모집했다. 그때 삼성에 입사, 돈사 설립부터 종돈 수입, 사육, 출하 등 전 과정을 다룬 신입 사원이 있었다. 20대 초반 신입 사원은 ‘평생’ 한국 양돈업 경쟁력 제고에 몸을 불사른다. 바로 그 주인공이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이다.

윤희진 회장은 20대 초반 삼성그룹에 양돈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국내 양돈 최고 기업인 선진의 기틀을 잡았고, 양돈 최대 조합인 도드람양돈조합 창립 멤버이자 초대 회장으로 한국 양돈의 부흥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돼지콜레라방역본부 상임이사로 한국의 콜레라 근절을 총지휘, 일본 돈육 수출을 주도했으며 국제축산박람회 운영위원장으로 한국의 축산업 위상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로로 정부와 각종 단체로 받은 감사패와 공로패는 윤 회장의 발자취를 묵묵히 인정하면서 빛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비(多肥)’라는 종돈 회사를 설립, 우수 종돈 보급을 통해 양돈업 경쟁력 제고에 이바지했다. 특히 다비가 양돈 사관학교라는 찬사가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 지금도 그들은 양돈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사회 봉사활동에 적극적이고 활발하다. ‘일가(故김용기 장로 아호)재단’ 청년 일가상을 제정, 후원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탈북자,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 교육 사업, 북한 결핵 치료에 앞장서고 있는 유진벨 재단, 성골롬방 수녀회 등 많은 단체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인간은 관을 덮은 다음 평가해야 한다는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는 성어가 있지만, 산수(傘壽;80세)를 앞둔 윤 회장의 이러한 자취를 되돌아보면 ‘양돈 인간문화재’라 해도 이견(異見)이 없을 성싶다. 그런 그를 양돈타임스는 창간 23주년을 맞아 4월 19일 안성 다비육종 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가 끝났다.

먼저 50년 넘게 종사하고 있는 양돈 입문 이유가 궁금했다. “1968년 삼성그룹에서 서울대 농과대학으로 추천의뢰서가 왔지요. 그때 이병철 회장의 직접 면접을 거쳐 4명이 뽑혔는데 그중의 하나가 접니다. 삼성이 신갈 근처에 300만평의 땅을 매입하고 당시 돈으로 29억원을 투자하여 돼지 등 축산종합단지를 건설할 예정이었지요. 특히 이병철 회장은 앞으로 삼성 신규사업은 전자사업과 축산업이라며 의지가 강했어요. 헌데 돈도 많이 들어가고, 투자 대비 수익이 불투명하고, 축산에 대한 정부 관심도 줄면서 축산단지산업은 점차 흐지부지됐고 우리 팀도 뿔뿔이 흩어졌지요. 그런데 저는 안양 골프장 한쪽에서 닭과 돼지를 기르고 밤나무도 심고 곰도 일본에서 수입하면서 계속 근무했지요.”

윤 회장은 당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고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70년대 초반 전국의 산은 거의 벌거숭이였어요. 이병철 회장은 그걸 안타까워하면서 거기에 밤나무 등 유실수 심어 밤을 일본에 수출했어요. 밤나무 거름 때문에 양돈장을 건설하게 됩니다. 73년 급하게 양돈사업계획을 만들어 일본에서 종돈 614마리를 입식했고, 2년 동안에 돈사 100동을 지었어요. 군대식으로 밀고 갔죠. 양돈 전문서적이 부족해 일본 수의사에게 배우고 일본 책을 번역하면서 스스로 양돈기술을 익혀갔지요. 첫 아이 돌잔치에 손님이 다 간 다음 집에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28살 때 덜컥 양돈사업소장으로 임명됐어요. 이때 양돈을 나의 평생 직업으로 삼겠으며 한국 양돈산업 발전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1970년대 중후반 한국 양돈업은 기업 진출이 활발한 시기였다. 삼성이 돼지를 키우고 돈이 된다 하니 기업들의 참여가 잇달았다. 특히 수산업 쪽에서 양돈에 관심이 많았다 한다. 양돈을 모르는 수산쪽 사람들이 유능하고, 젊은 인재를 물색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중의 하나가 선진을 창업한 이인혁씨가 윤 회장을 찾았다.

윤 회장은 “이인혁 회장이 저에게 양돈 일을 전적으로 믿고 맡기셨어요. 선진 모태인 제일종축농장에서 일을 시작하여 종돈장(선진원종농장), 코리아 화암, 진천 SPF 종돈장을 건립하고 85년 6월에 그만 두었지요. 선진의 돼지는 5만두로 늘어났고 사료공장까지 갖추게 됐고, 비육돈 위탁산업도 시작해 양돈 계열화사업 기초를 다져놨지요. 참으로 열심히 했지요.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됐습니다.”

선진 이인혁 회장의 아쉬움과 극진한 환송 속에 윤 회장은 선진을 떠난다. “선진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면서 내 농장에 대한 꿈은 항상 버릴 수 없었어요. 늦어도 40세 이전 창업을 다짐하고 선진 다니면서 돼지를 사육했지요. 모돈 120두 규모의 대월종돈장이 다비육종의 모태이지요. 다비(多肥)는 산자수 많으라고 많을 다(多)에 살찔 비(肥)로 받침이 없어 외국인도 부르기 좋은 이름이지요.”

올해로 다비가 40주년 되는 해다. 모돈 100여두 시작한 다비는 현재 6만5천여두(주주 포함)를 사육하고 있고, 연 11만마리를 출하하고 있다. 직원도 250여명에 이르고 있다. 특히 금년 7월쯤에는 종돈 100만두 판매(누계)를 기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00만마리면 국내 양돈농가 대부분이 다비종돈을 한번은 입식한 숫자로 보인다. 이것 하나만 하더라도 다비가 국내 양돈업에 기여한 공헌은 한국 양돈업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윤 회장은 다비 창업 후 중년의 신중함과 빠른 결단력으로 양돈업 승부를 종돈에 건다. “미국에서 종돈을 수입했는데 질병 문제로 이어지지 못했고 다음에 스웨덴, 영국을 찾아갔어요. 영국 J.S.R과 우수 종돈 공급망을 확보했지요. 종돈의 번식능력이 중요했기 때문이죠. 즉, PSY가 많아야 합니다. 선진국에 보내는 등 직원들 교육에 많이 투자했지요. 결국 27두를 거쳐 22년 30.9두, 올해는 33두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윤 회장은 한국 양돈업의 시야를 세계로 돌린다. “베트남이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였어요. 돼지고기를 많이 소비하고 있는데 발전이 덜 된 거예요. 발전 가능성을 보고 04년 CJ와 함께 법인을 설립했지요. 그래서 양돈 관련 베트남 사람을 한국에 초청, 연수도 하고 양돈 관련 잡지도 만들고 종돈도 보내고~많은 노하우를 제공했지요. 그게 보람이지요”

윤 회장은 북한 양돈업 진출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DJ 정부서 남-북 관계가 원만해지면서 3차례 종돈을 보내고, 사료를 보내주고, 정액 제조기술을 알려주면서 북한으로부터 ‘고맙다’ 인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남-북 정치 상황에 의해 중단, 평양 인근의 양돈장 건설 계획 등이 무산돼 아쉬워했다.

윤 회장은 양돈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본업인 다비 경영보다 양돈 발전을 위한 대외 활동 강화와 양돈 미래에 대해 같이 고민, 전망, 분석해보고 양돈 현안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등 한국 양돈의 비조(鼻祖)로서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 각종 사회 봉사단체를 후원하면서 사회 지도층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양돈업의 위상을 높여가며 소일하고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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