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악성 민원으로부터 농가 보호할 제도적 장치 마련 시급
양돈장 곳곳서 악성 민원 노출 귀촌민‧면회객‧자영업 주로 제기 부동산업자가 주민 민원 현혹도 냄새 저감에도 냄새 제로 요구 시설투자에 관리 강화에도 핀잔 악성 민원 반복 근절 행정 필요
전남 보성의 한 양돈농가가 악성 민원에 따른 심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지 올해로 2년이 됐다. 당시 양돈업계는 한 농가의 안타까운 죽음을 계기로 악성 민원으로부터 농가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촉구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양돈농가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냄새를 줄이기 위해 시설을 갖추고 관리 수준을 높여도 민원은 이어지고, 법적 기준을 충족하고 있는 농가조차 반복되는 민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농가 현장에서는 “얼마나 더 해야 하는 것이냐”는 하소연까지 나오고 있다.
■냄새를 줄여도 끝나지 않는 민원=강원도에서 양돈장을 운영하는 한 농가는 최근 군부대 면회객들로 인한 냄새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농장 측은 민원을 줄이기 위해 냄새 저감장비를 설치하고 시설과 환경 관리에도 지속적으로 투자해 왔다. 실제 과거와 비교하면 농장 주변에서 느껴지는 냄새도 크게 줄었다는 것이 농가의 설명이다.
문제는 민원인들이 요구하는 기준이다. 농가가 체감할 정도로 냄새를 줄였음에도 일부 민원에서는 사실상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가 입장에서는 축산시설에서 발생하는 냄새를 법적·기술적으로 최대한 줄이는 것과 냄새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입장이다.
고성의 한 농가는 “냄새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계속하고 있지만 냄새가 0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원이 반복되면 농가 입장에서는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대한민국 상위 1% 수준으로 관리해도 ‘민원 폭탄’=충청지역의 한 양돈농가가 겪는 상황은 더욱 답답하다. 이 농가는 농장 내 냄새 관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축사 내부 암모니아 농도는 높은 곳에서도 3ppm을 넘지 않는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부패가스는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여기에 바이오커튼과 탈취시설까지 갖추고 농장 주변 환경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
농가 스스로는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냄새 관리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농장 주변에 새롭게 들어온 주민들의 민원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농장과 약 250m 떨어진 곳에 들어선 한 카페와의 갈등도 농가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농장 측에 따르면 카페 운영자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민원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농가는 “이 정도로 관리하는 농장까지 냄새를 이유로 문을 닫아야 한다면 국내 양돈농가 가운데 남아 있을 농장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호소한다.
농가 주변에서는 귀농·귀촌으로 이주해 온 주민들의 민원이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농가 측은 일부 기획부동산 업자가 주민들에게 ‘양돈장이 문을 닫으면 주변 땅값이 올라간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가 관계자는 “농장을 운영하면서 법을 지키고 냄새를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하고 있다”며 “그런데도 농장이 없어져야 주변 땅값이 오른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농가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농가 다 그만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갈등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농가와 민원인 사이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해당 농가는 한 민원인에게 “대한민국 상위 1% 수준으로 관리하는 농장까지 문을 닫으라고 한다면 사실상 국내 농가들에게 모두 그만두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취지로 항의했다.
그러자 민원인은 “그렇다면 카페도 그만두라는 것이냐”며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농가가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특정 시설이나 업종의 존폐가 아니다. 양돈업 역시 관련 법과 기준을 지키며 지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하나의 산업인데 주민의 주관적인 불편만으로 기존 농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축산농가가 주변 주민들의 냄새 불편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농가 역시 냄새 저감시설을 설치하고 환경을 개선하며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농가의 관리 노력과 법규 준수 여부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민원이 반복될 때마다 행정기관이 현장에 개입하고 추가적인 조치를 요구한다면 농가의 부담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민원 처리 방식 바꿔야”=보성농가 사건 이후 양돈업계가 줄곧 요구해 온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한돈미래연구소 등은 앞서 프랑스의 사례를 참고해 사전 점유 여부와 법규 준수 여부 등을 고려한 민원 면책 제도와 반복 민원 종결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법을 준수하면서 장기간 운영해 온 농장에 동일 민원이 반복될 경우 일정한 기준에 따라 민원을 종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보성농가의 2주기를 맞은 올해까지도 강원과 충청 등 전국 농가에서 비슷한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냄새를 없애기 위한 농가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안 된다’는 기준까지 요구된다면 축산농가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양돈업계에서는 이제 악취 저감시설 확대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농가의 관리 수준과 법규 준수 여부, 시설이 들어선 시점, 민원의 반복성 등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보성농가의 비극이 발생한 지 2년. 그동안 농가들은 냄새를 줄이고 시설을 개선하며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왔다. 이제는 행정과 제도가 그 노력에 답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