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탐방] "양돈은 우리 가족의 희망이며 미래입니다"
[농장탐방] "양돈은 우리 가족의 희망이며 미래입니다"
1990년 숙부 권유로 양돈 참여
30년여만에 1만두 규모로 성장
아내 아들 딸 등 가족 중심 농장

구제역‧ASF 등 ‘산전수전’ 겪어
농장 전체 살처분 당하는 아픔도
슬픔 딛고 재입식 통해 다시 일어서

ICT 등 새로운 투자로 생산기반 구축
8대 방역시설 갖추고 농장도 환경친화적
선진과 30년 지기, 관계 넘어 동반자로
  • by 김현구
ASF로 잠시 휴지기를 가진 이장원 대표와 가족들은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새로운 양돈 인생을 위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ASF로 잠시 휴지기를 가진 이장원 대표와 가족들은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새로운 양돈 인생을 위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양돈장이 아닌 여의도와 세종청사, 광화문 아스팔트에서 그를 처음 봤다. 전세계 유례없는 정부의 ASF 지역 단위 살처분 광풍 속 그의 농장 돼지도 땅에 묻은 이후 재입식을 하게 해달라는 집회 현장에서다. 그는 현장에 항상 아들과 함께 있었다. 아버지보다 키 큰 아들은 돼지 잃은 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재입식 허용 구호를 함께 외쳤다. 이 모습이 매번 기자의 눈에 띄었다. 부자(父子)가 절박하게 구호를 외친 모습이 머릿속에 남은 이유였다.

바로 그가 양주축산의 이장원 대표다. 1년 만에 아스팔트가 아닌 양돈장에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1년 전 거리에서 봤던 야위었던 얼굴도 제법 살이 붙고, 표정도 밝았다. 그는 “양돈인은 현장에 있어야, 살아 있는 것 같다”며 9월 첫 출하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기쁜 소식으로 첫 인사를 전했다. ASF로 살처분 한 지 약 2년 만이다.

그동안 농장은 8대 방역 시설을 갖춘 농장으로 변모했다. 특히 농장을 뺑 둘러선 울타리가 눈에 띄었다. ASF 방역상 농장 출입은 하지 않았지만, 사무동까지 가는데 만해도 방역 절차가 꽤 까다로웠다. 첩첩의 방역 단계를 거친 후 비로소 사무실에 앉아 이장원 대표의 ASF 살처분 이후 동향 및 그의 30년 양돈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대표의 양돈 인생은 30년전 경기도 양주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젊은 시절 팍팍했던 서울생활을 접고, 1990년 작은 아버지의 권유로 양주에서 임대로 양돈에 입문했다. 그래서 양돈장 이름도 ‘양주축산’이라고 지었다. 그는 “당시 양주는 군부대가 많아 잔반을 얻어 비육돈을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양돈업이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포천으로 이동 모돈 두수를 70두로 늘리고 일관사육 형태로 전환했습니다.” 그러나 포천에서도 임대 생활의 연속이었다. 임대 농장이었지만 내 농장이라는 생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돼지를 잘 키워냈다. 그러한 노력이 비로소 2000년 농장 마련이라는 결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농장 지을 땅은 구입했지만, 돈사를 올리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는 “연천에 땅을 구입한 후 농장을 짓기 전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많았습니다. 주변에 양돈장이 많아 양돈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밤낮 없이 주민들을 만나 깨끗하고 조용하고, 냄새 없이 양돈을 하겠다고 수없이 설득했어요. 이후 주민들도 간절한 호소를 받아들여 드디어 돈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이 대표는 이러한 주민들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주민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 유지, 상생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 같이 연천에 첫 보금자리 마련 이후 이 대표의 본격적인 양돈 인생 2막이 전개됐다. 이 대표는 한국 양돈업이 지속 가능한 발전할 것이라는 미래 지향적인 판단 아래, 당시 기술로는 가장 최신의 돈사를 짓고, 돼지가 성장하기 가장 좋은 환경을 구축했다. 이 대표의 양돈 철학이 반영된 돈사였다. 이후 소모성 질병이 농장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극복하면서 생산성이 꽤 괜찮았다. 그러나 2011년 구제역의 화마(火魔)는 피해갈 수 없었다.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경기 북부지역까지 휩쓸었던 것이다. 그래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재입식 이후 농수산대학을 졸업한 아들까지 농장 경영에 참여하면서 든든한 우군(友軍)을 얻었다. 또한 딸도 농장에 참여, 현재 농장 기록관리 및 회계 업무를 보면서 농장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특히 그는 30년간 양돈장을 함께한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했다. 그는 “아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제 양돈인생 오뚝이는 없었을 겁니다. 옆에서 묵묵히 일을 도와줬기 때문에 각종 위기에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족이 경영에 참여한 이후 농장은 톱니바퀴처럼 굴러갔다. 그러다 이 대표의 30년 양돈인생의 가장 큰 시련이 닥쳐왔다. ASF가 경기 북부 지역에서 터진 것이다. 이 대표는 “우리 농장은 ASF 예방 살처분 당시 모돈 1천두 규모의 자돈 전문 생산 농장이었어요. 묻기 전에도 이동제한으로 밀사로 자돈이 폐사되는 등 우여곡절 속 결국 정부의 지역단위 살처분 정책으로 모든 돼지를 묻었어요”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 대표의 가족들은 살처분을 계기로 더욱 공고해졌다. 힘든 시기를 함께 겪은 만큼 가족애는 더욱 커지고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대표는 이 같은 위기에서 주저앉지 않고 오히려 돼지 없는 틈을 기회로 승화시켰다. 대대적인 시설 투자를 실행한 것이다. 주저앉은 낡은 모돈 분만틀을 모두 교체하고, ICT 자동 급이기, 악취 저감 시설 등을 농가에 도입했다. 또한 정부의 요구대로 8대 방역 시설 설치를 완료하고, 농장도 환경 친화적인 모습으로 가꿔 나갔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재입식 시기가 불투명해지면서 속은 타들어갔다. 이 대표는 “집회에 참여도 해봤고,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만나 용기를 내서 쓴소리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재입식을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어요. 양돈이 저희 가족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기 때문이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다행히 지난해 재입식이 허용되고 농장에 돼지 울음이 다시 들리면서 이 대표는 다시 잃었던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이제 다시는 지역 단위 살처분 정책은 지양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SF 재입식을 계기로 양돈 인생 3막이 시작됐다. 이 대표는 “ASF 이후 아들과 딸에 농장 운영을 많이 맡기고 있다. 아직 아들을 봤을 때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위기를 함께 겪은 만큼 한 단계 성장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들이 한단계 위기를 겪으면서 농장도 더욱 잘 운영할 것으로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30년간 일편단심으로 사료를 거래한 선진사료와의 관계도 더욱 돈독해졌다. 돼지가 없어, 사료도 구입하지 못했지만 선진은 이전과 같이 많은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진정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동반자의 뜻을 다시 한 번 새길 수 있었다”고 감사해했다. 선진의 모토인 동반자 관계가 위기에 더욱 빛난 것이다. ASF를 계기로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처럼 선진과의 유대 관계도 더욱 공고해 졌다.

짧은 인터뷰를 통해 기자가 바라본 이 대표는 매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가진 이유로 ASF로 잃어버린 시간은 재입식 이후 잊은 지 오래라고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양돈 목표도 생겼다고 한다. 현재 아들이 20대인 점을 고려, 아들이 환갑까지 운영할 수 있는 양돈장을 구축하기 위해 전력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것. 아울러 아들에게 선배 양돈인으로 후배 양돈인들에게 가지는 책임감과 하고 싶은 말도 전했다. 이 대표는 “밀려 들어오는 수입육으로부터 농장 스스로가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이제는 내 옆 농장과의 경쟁이 아니라 양돈선진국 농장들, 수입육 업체와의 경쟁인 것이다”며 생산성 향상에 주력할 것을 당부했다.

ASF로 잠시 휴지기를 가진 그와 가족들은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며 오직 지속 가능한 양돈장 미래만 바라보면서 다시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 이처럼 한 양돈인의 오뚝이 같은 의지가 모여 미래 한돈산업을 지탱할 원동력이 될 것으로 전망, 한돈산업의 미래는 더욱 밝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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