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후배 양돈인들이 돼지 잘 키울수 있도록 도울 방안을 찾고 있어요”(5/10)
[특별인터뷰]“후배 양돈인들이 돼지 잘 키울수 있도록 도울 방안을 찾고 있어요”(5/10)
  • by 양돈타임스
[특별인터뷰]“후배 양돈인들이 돼지 잘 키울수 있도록 도울 방안을 찾고 있어요”

윤희진 (주)다비육종 회장

20대 때 양돈 규모·기업·자동화 읽어
원없이 일했던 30대 시절 가장 행복해
이병철·이인혁 회장과 일한 건 큰 복
‘내 농장 꿈’ 간직하면서 회사일 열심
한국 양돈업 세계 진출준비 서둘러야
T자형 인재로 거듭나길 후배에 당부
시간 낭비하는 사람 전문가될 수 없어

중국 춘추전국시대 섭공이라는 초나라 제후가 있었다. 제후는 백성이 날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떠나니 인구가 줄어들고 세수가 줄어들어 큰 걱정이 돼 어느 날 공자에게 자문을 구했다. “선생님, 날마다 백성이 도망가니 천리장성을 쌓아서 막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공자는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 여섯 글자를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이 말은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찾아온다”라는 뜻. 이런 공자의 말을 자신의 철학으로 삼아 40여년을 한국 양돈산업 발전을 위해 투신한 윤희진<사진> 다비육종 회장. 그는 양돈을 자신의 평생의 직업으로 결정한 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산업 발전을 위한 밑그림으로 삼았다. 바로 그것이 ‘양돈 인재 양성.’
그런 그를 최근 안성 본사에서 만나 한국 양돈산업 발전을 이끈 1세대 기수로서, 한국 양돈의 산증인으로서 지난 40년간의 양돈 인생을 돌아보고 현재의 FMD위기에 처해있는 양돈 산업에 관한 혜안과 조언을 들었다.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최근 근황을 묻자 그는 매사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윤 회장은 “작년 4월 경영자 자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그 동안의 양돈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며 “양돈과 함께 행복했던 지난날들을 회고하며 후배 양돈인들이 더욱 더 빛을 낼 수 있도록 뒷전에서 도울 방안을 찾고 있다”며 회사의 발전과 더불어 한국 양돈 산업 발전을 위한 밀알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행복처럼 양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점에 대해 궁금해 물었다. 그는 고심하더니 30대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답하면서 양돈 발전을 위해 원 없이 일했던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것이다. 20대 삼성 계열인 용인 자연농원 입사를 거쳐 30대에 지금 선진의 모태인 제일종축농장 운영에 참여하고 선진사료 출범을 함께하면서 양돈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그 당시 느꼈던 행복한 일들을 회상하며 “돼지 값이 하락한 적도 있었지만 돼지 키우는데 신이나 밤낮없이 일을 했다”며 당시를 되돌아봤다.
그는 이어 선진과 동고동락했던 행복했던 30대의 시간이 지나 다비육종을 설립한 배경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선진에서 일하면서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내 농장을 경영해 보겠다는 소박한 꿈은 갈수록 커져갔다”며 선진과의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창업 배경을 소회했다. 그래서 그는 양돈산업 중에서 제일 비중이 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돈업을 하겠다는 각오로 영국 등을 돌아보며 다비육종을 설립, 제2의 양돈인생을 시작했다. 87년 종돈 수입차 영국을 다녀오면서 1차 목표를 연간 종돈판매 2만두로 정한다. 당시 영국의 양돈규모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종돈시장 규모는 20만두 정도인데 1위업체가 6만두, 그 다음이 2만두, 1만두씩 규모여서 2만두 판매 이상은 돼야 기업경영체제를 갖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윤 회장은 매년 1천500마리 가량 종돈을 수입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종돈 수입 대신 자체 개량을 통해 종돈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유로 국내 양돈 생산성이 정체되어 있는 것은 양돈기술, 시설, 사료가 아닌 위생이라고 강조한 그는 “FMD는 별개로 하고 PRRS(생식기호흡기증후군), 오제스키 등 돼지에서 질병이 발생, 만연했던 이유는 외국 종돈이었다”며 “질병퇴치를 통한 양돈산업 경쟁력 제고의 길은 우리만의 종돈을 위해 개량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녹차와 커피, 과일이 들어왔다. 녹차를 마신 후 질문을 이어갔다. 사람을 중시하는 윤 회장에겐 어떤 소중한 인연이 있을까 기억에 남는 인연에 대해 물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이 모두 소중하지만 그 중에 꼽자면 양돈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삼성그룹 故 이병철 회장과 선진을 출범하고 행복한 30대를 함께 보낸 이인혁 회장을 주저 없이 꼽았다. 특히 이병철 회장과의 만남은 특별한 경험으로 그 당시 국내 양돈 사육규모는 전체 120만두 규모로 70만호 농가들이 돼지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는 농가 호당 평균 2마리로 산업이 아닌 수준이었지만 이 회장의 사업 비전아래 양돈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서 양돈인으로서의 꿈을 품게 해준 은인이라는 것. “그 당시 양돈이 기업화와 규모화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을 못한 상황에서, 한겨울 꽁꽁 언 땅을 파는 것처럼 시작 초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양돈이 산업으로서 규모화와 전문화를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 이 회장과의 만남은 일생일대의 행운 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소중하다며 이 모든 사람을 만난 것이 개인적인 복이라며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전달했다.
윤 회장은 양돈 1세대로서 많은 일을 했다. 자신의 일과 더불어 양돈산업을 위해 헌신한 공(功)은 어떤 그릇에라도 담을 수 없다. 한국양돈연구회 설립, 도드람조합 설립 산파역, 방역본부의 기틀을 다진 것 등. 이런 양돈 발전의 업적을 보면서 오로지 양돈만 바라보면서 살았던 윤 회장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기자의 머릿속에 잠시 스쳐갔다.
그런 그도 양돈인생에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나 보다. 그는 “농가들의 권익보호 및 증진, 생산비 절감을 통한 수익 증대를 위해 도드람양돈조합이 구성원과의 갈등으로 결별한 것이 못내 아쉽다”며 이상적인 계열화 조직을 꿈꾸고 도드람조합에 뛰어들었지만 목적이 달라 분열돼 그 당시 산파역으로서 책임을 느낀다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동안 말이 없던 윤 회장은 돼지 육종부문에 대해 미련이 많아 보였다. 앞으로 세계는 종자 등 누가 얼마나 우수한 종(種)을 확보한 사람이나 기업이 승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 그는 축산대학에서 종돈(육종학)에 대한 전문가 부족을 지적했다. 그는 “육종을 가르치는 학교는 거의 없기 때문에 외국으로 인재들을 보내 교육을 받는 현실은 경쟁력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며 앞으로 벌어질 종자전쟁에 대비,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금의 가축위생방역본부의 전신인 ‘돼지콜레라박멸비상대책본부’에 주도적으로 참여, 대만 FMD로 인한 일본으로의 수출 중단의 호기를 이용, 일본으로의 한국 돈육 수출을 위한 과제인 콜레라 박멸을 위해 매진한 것은 개인으로서 영광이었고 보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주위 농가와 사료 동물약품 등 관련업계의 성원으로 제주를 제외한 8개 도본부를 조직, 돼지 열병 근절 의지를 다지고 대일(對日) 돈육 수출에 기반을 다진 것은 한국 양돈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일본으로의 돈육 수출은 중국으로부터의 돈육 수입 압박에 대한 문제를 털어버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비대본’ 활약을 재평가했다. 이렇게 조직된 비대본은 2000년에 발생한 FMD 종식에 상당한 기여를 하자 정부에서 민간방역운영 단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확대 개편, 오늘날 방역본부로 이어졌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번 FMD로 옮겨졌다. 그는 이번 FMD와 관련, FMD의 발생 원인과 사후처방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면서 정부와 일부 언론이 발생 원인을 농가에게 전가, 억울하다고 분노했다. “현재 잘못된 사실로 농가들이 FMD의 주인(主因)으로 몰린 이때 자체적으로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한다”며 억울한 현실이지만 향후 대책을 세워 대응방안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FMD 등 특정 질병 전파를 막기 위해서는 생돈, 자돈 이동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며 장기적으로 지역적인 이동을 좁힐 수 있는 방안을 제안했다. “생돈과 자돈의 장거리 이동은 방역상 바람직하지 못하며 출하돈은 산지에서 도축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유럽의 덴마크는 생돈 수송은 거리적으로 제한을 두고 있어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 기자가 윤 회장 말을 막고 최근 FMD 방역과정 중 순직한 공무원 유가족들에게 1억원을 전달하는 배경을 물었다. 그는 “양돈산업 재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순직한 공무원들에 대한 예를 갖출 필요가 있었다”며 기부금 모금 운동을 활발하게 벌여 국민들에 대한 양돈산업의 부정적 인식을 시급히 전환해야 할 것이라는 말로 대신하며 양돈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주문했다. 그의 이런 기부는 꼭 이런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윤 회장의 손길은 멀지 않다. 밝히기를 꺼려한 그는 마지못해 ‘따뜻한 동맹’이라는 법인 활동에 동참해 탈북자, 다문화 가정 등을 돕고 있는 것을 비롯한 몇몇 곳을 말하면서 양돈관련 뿐만이 아닌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과 함께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상생기업으로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숨을 고른 그의 발언은 양돈산업 발전 방안으로 이어나갔다. FMD로 돈육 수입이 증가하면서 자급률 하락을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강조한 윤 회장은 앞으로 양돈산업은 내수 경쟁을 넘어 해외로 진출해 시장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FMD로 돼지고기 수출이 어려운만큼 기술력이 뛰어난 업체들이 베트남이나 필리핀 중국에 진출, 한국의 양돈산업 ‘파이’를 키워야 할 것이라며 04년 베트남에 진출한 다비의 경우 자리매김에 성공, 해마다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 회장의 지나온 생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으니 기자와 윤 회장의 ‘배꼽시계(점심)’는 자연스럽게 연장됐다. 화제를 전환해 다비 설립당시의 목표와 현재 목표달성 여부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다비를 설립했을 때 소박한 꿈을 가졌다. 하지만 선진 양돈국가를 시찰하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 속에 2만두 판매 목표로 수정, 결국 99년 IMF의 시련을 뚫고 목표를 달성했고, 계속된 판매량으로 지난해 3만5천두에 이르는 성과를 올렸다 한다. 종돈 독립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다비 설립 당시 목표를 이뤘지만 더 높은 비상(飛上)은 후배에게 넘겼다. 2015년 7만두 판매 목표를 달성하고 양돈산업의 기틀인 종돈산업 발전을 위해 힘써 줄 것을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또한 후배 양돈인들이 T자형 인재로 거듭나길 당부했다. 그가 말하는 T자형 인재는 자기분야에서 고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영역과 잘 융합되고 협력하며 통섭할 수 있는 인재를 의미한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만사형통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모르면 하는 일을 좋아하면 된다”며 후배 양돈인들이 즐거운 맘으로 양돈을 사랑하면 산업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덧 3시간여에 인터뷰가 끝났지만 윤 회장의 40여년의 양돈 인생을 짧은 시간에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양돈과 함께한 인생 40년을 정리하며 마지막 말을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돈은 늦게 벌 수 있고 저축도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저축도, 벌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맡은 업무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양돈업도 발전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약력
1945년 충남 청양 출생
1963~67년 서울대학교 축산학과
1968~75년 삼성 관계사 근무(중앙개발, 중앙일보, 제일제당)
1975~85년 선진축산(주) 상무이사
1979~81년 양돈연구회 회장
1986년 (주)다비육종 설립
1993년 도드람양돈사업회 회장
1995년 종축개량협회 부회장
2000년 가축방역위생지원본부 상임이사
2001년 대한양돈협회 부회장
2005년 국제축산박람회 추진위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